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키포로스 2세 (문단 편집) === 즉위과정 === 963년 3월 15일, 로마노스 2세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급사했다. 근대와 현대의 역사가들은 젊은 황제가 과도한 음주와 무분별한 성생활을 보내다가 건강을 망친 것으로 판단하지만, 어떤 이들은 황후 [[테오파노(10세기)|테오파노]]가 그를 독살했다고 의심한다. 테오파노는 지성적이고 야심이 많은 여성으로서 악명이 높았고 후기의 역사가들은 그녀를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무자비한 여성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남편을 독살했음을 입증할 단서는 없다. 로마노스 2세는 그의 두 아들 바실리오스와 콘스탄티노스를 공동 황제로 선정했다. 로마노스 2세가 죽었을 때, 바실리오스는 5살이었고 콘스탄티노스는 겨우 3살이었으므로 테오파노는 섭정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테오파노는 혼자서 지배할 수 없었고 로마노스의 수석 참사관이자 환관 요세프 브랑가스와 함께 힘을 합쳐야 했다. 브랑가스는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자 했으며 니키포로스의 힘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브랑가스는 니키포로스가 군대와 귀족의 지지를 받아 왕좌를 주장할까봐 두려워했다. 브링가스는 뒤늦은 개선식을 벌이며 백성들의 찬사를 받는 니키포로스를 제거하기 위해 황궁으로 불러들여 죽이려 했다.그러나 니키포로스는 이 환관의 의도를 눈치채고 소피아 대성당에 가서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고 고발했다. 이에 시민들은 들고 일어났고 결국 브링가스는 원로원이 자신의 동의도 없이 니키포로스를 사령관에 유임시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아나톨리아로 돌아간 니키포로스는 테오파노와 밀약[* 바실리우스와 콘스탄티누스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대신 그 자신도 공동 황제가 된다는 약속이었다.]을 맺고 킬리키아 원정에 대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소집한 뒤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했다. 이에 브링가스는 니키포로스의 부하 로마노스 쿠르쿠아스와 요안니스 치미스케스에게 서신을 보내 그들의 상관을 배신하는 대가로 각각 동방과 서방의 최고 사령관직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서신을 니키포로스에게 보이며 결단을 촉구했고, 결국 니키포로스는 963년 7월 2일 카이사레아에서 황제를 자칭했다. 그후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자신을 공동 황제로 받아들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브링가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수비를 강화하고 니키포로스의 아버지 바르다스를 인질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바르다스를 잡으려는 이들을 공격해 죽여버렸고, 결국 니키포로스는 콘스탄티노플에 무혈 입성해 제국의 황제로 떠받들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